제철코어, 좋은 때를 찾는 취향
제철코어’란 ‘알맞은 시절’을 뜻하는 순우리말 ‘제철’에, 패션이나 라이프스타일에서 특정 스타일의 핵심을 지칭하는 접미사 ‘코어(Core)’가 결합된 신조어다. ‘코어’는 단순히 하나의 아이템이 아닌, 그것을 중심으로 한 미학적 태도와 삶의 방식을 포괄하는 용어다. 평범함(Normal)을 추구하는 ‘놈코어(Normcore)’나, 아웃도어용 간식(Gorp)에서 이름을 따 기능성 의류를 일상복처럼 입는 ‘고프코어(Gorpcore)’가 좋은 예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5월 말, 하우스에서 조심스럽게 익어간 털복숭아가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복숭아의 계절은 막을 올린다. 이때부터 복숭아의 수확 시기는 주 단위로 촘촘하게 쪼개진다. 6월 중순이 되면 겉은 천도, 속은 백도인 ‘신비복숭아’가 단 2~3주의 짧은 허락 끝에 홀연히 사라진다. SNS에서 본 복숭아를 올해는 꼭 맛보리라 다짐하지만, 며칠만 머뭇거려도 금세 철이 지나가 버린다. 그리고 독특한 모양으로 많은 이의 시선과 입맛을 사로잡는 유럽산 ‘납작복숭아’의 때가 어느새 시작된다. 7월에 들어서면 백도 계열의 ‘유미’와 황도 계열의 ‘수황’ 같은 조생종 품종들이 릴레이를 펼치고, 7월 하순에는 과즙이 풍부한 ‘아까즈끼’가, 8월 초에는 ‘애천중도’와 ‘천중도백도’가 여름의 절정을 알린다. 이처럼 여름 한 철에도 품종별로 미묘하게 다른 맛과 향을 지닌 복숭아들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철마다 바뀌는 품종의 연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이벤트다. ‘지금’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찰나의 가치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제철코어는 단순히 제철 음식을 챙겨 먹는 식도락을 넘어, 특정 ‘때’에만 허락된 음식, 활동, 콘텐츠, 이벤트 등 고유한 경험과 감성을 의식적으로 찾아 누리는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아우른다. 봄의 미나리, 여름의 초당옥수수, 가을의 전어, 겨울의 대방어처럼 ‘지금’이 아니면 즐길 수 없는 것들의 가치가 재조명되는 현상이다. 이는 제철을 챙기는 행위가 더는 낡고 고루한 것이 아닌, 현재를 충실히 만끽하는 가장 세련되고 ‘힙’한 취향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특히 기후 위기나 기술 발전으로 사계절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사라져가는 계절감을 의식적으로 붙잡고 복원하려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결국 제철코어는 계절의 리듬에 맞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경험하고 큐레이션하는’ 능동적인 라이프스타일 그 자체를 뜻한다.
진짜의 맛을 찾아서, 제철 음식
제철코어의 가장 대표적인 영역은 단연 음식, 그중에서도 과일이다. 농업 기술의 발달로 대부분의 과일을 사시사철 맛볼 수 있게 된 지도 오래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자연의 순리대로 익은 ‘진짜 제철’의 맛에 더욱 열광한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도다리쑥국을 먹고, 아삭하고 수분감 넘치는 초당옥수수로 여름이 시작되는 기분을 느끼고, 가을에는 전어구이로 찬바람을 맞이하는 식이다.
제철에 대한 열기는 프리미엄 경험 소비로도 이어진다. 겨울과 봄 사이, 호텔가에서 벌어지는 ‘딸기 뷔페’ 전쟁이 대표적이다. 1인당 10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에도 예약이 어려운 이유는, 단순히 딸기를 먹는 행위를 넘어 그 계절의 정점을 경험하고 SNS에 인증하는 특별한 추억까지 함께 소비하기 때문이다. 호텔은 물론 여러 빙수 가게와 베이커리에서 앞다퉈 출시하는 망고 빙수 역시 계절감을 뽐내는 대표적인 여름 한정 메뉴다.대전의 유명 빵집 성심당의 계절 시루 케이크 시리즈와 이를 둘러싼 열광 역시 제철코어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겨울부터 봄까지는 ‘딸기 시루’가 판매된다. 봄이 가면 ‘망고 시루’와 ‘샤인, 멜론’이 여름을 알리고, 가을에는 ‘무화과 시루’와 ‘알밤 시루’가 그 자리를 잇는다. 각 계절의 가장 맛있는 순간을 케이크 한 상자에 응축시켜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강력한 희소 가치를 부여하자 ‘오픈런’과 긴 줄서기가 뒤따랐다. 제철을 소비하는 것이 하나의 계획된 이벤트이자 즐거운 문화가 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현상이다. 요즘에는 ‘금수저’에 빗대, 제철 과일을 마음껏 즐기는 ‘제철과일수저’라는 말도 등장했다. 그때그때 가장 신선한 과일을 먹을 수 있는 경제적, 심리적 여유와 정보력을 부러워하는 표현이다.
제철 경험, 그 순간 그곳에 내가 있다
제철코어는 미식 경험을 넘어, 그 계절의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 으로 확장된다.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처럼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자연 현상 자체가 거대한 축제의 장이 된다. 각 지자체에서 열리는 계절 축제는 제철을 가장 몰입감 있게 즐기는 방법으로 각광받는다. 1월 ‘철원 한탄강 얼음 트레킹 축제’에서 얼어붙은 강 위를 걸으며 겨울의 정취를 만끽하고, 4월 ‘고양국제꽃박람회’에서 봄의 화사함을 즐기며, 10월 ‘진주남강유등축제’에서 밤하늘을 수놓은 등불을 감상하고, 11월 ‘익산천만송이국화축제’에서 늦가을의 정취에 흠뻑 빠지는 식이다.
전통적인 계절 축제와 더불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된 ‘시즌제 이벤트’는 제철코어 경험의 정점을 보여준다. 여름의 상징이 된 ‘흠뻑쇼’와 ‘워터밤’이 대표적이다. 이들 페스티벌은 인기 가수의 공연에, 여름에만 가능한 ‘물놀이’와 ‘음악’을 결합해 대체 불가능한 경험을 선사한다. 흠뻑쇼에서는 수백 톤의 물대포가 터지고, 워터밤에서는 관객과 가수가 한데 어우러져 물총 싸움을 벌인다. 19세 이상만 입장할 수 있는 ‘워터밤’은 특유의 자유롭고 열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SNS에 올릴 만한 화려한 장면을 연출하며, 매년 새로운 '워터밤 여신'을 탄생시키는 등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왜 우리는 ‘순간’에 집착하는가
사람들이 제철코어에 열광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시간의 희소성’에 있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은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 시기에만 맛볼 수 있다는 시간의 희소한 가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때가 아니면 안 되므로 소비자의 욕구를 즉각적으로 자극하며, 놓치면 후회할 것이라는 손실 회피 심리를 부추긴다. “지금이 아니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라는 사실 자체가 강력한 구매 동기가 되는 것이다. ‘기간 한정’, ‘수량 한정’ 같은 문구에 소비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여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소비 패턴은 ‘시간’의 가치를 극도로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시간을 자원으로 여기고, 세상을 점점 더 짧은 단위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찰나를 중시하는 현대인의 관점을 가장 감성적으로 표현한 소비가 바로 ‘제철코어’ 트렌드다.
이는 소비의 패러다임이 ‘소유’에서 ‘경험’으로, 나아가 ‘순간’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철 경험은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각을 제공하며, 소비자들을 기꺼이 그 ‘순간’ 속으로 뛰어들게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찰나의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한정판 제품을 사기 위해 밤새 줄을 서는 ‘오픈런’은 필수가 되었고, 특정한 때에만 열리는 공연이나 이벤트에 참여하려면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처럼 필사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결국 제철코어는 소유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가치를 소비하는 행위이며, 덧없이 흘러가는 현재를 가장 충실하게 붙잡으려는 현대인의 욕망이 투영된 현상이다.
전망
현대인의 소비 패턴은 ‘시간’의 가치를 극도로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시간을 자원으로 여기고, 세상을 점점 더 짧은 단위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찰나를 중시하는 현대인의 관점을 가장 감성적으로 표현한 소비가 바로 ‘제철코어’ 트렌드다.
따라서 제철코어 트렌드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AI가 개인의 취향과 건강 상태, 현재 위치를 분석해 ‘지금 당신이 경험해야 할 최적의 제철코어 활동’을 실시간으로 추천해 주는 초개인화 서비스가 등장할 수 있다. 사라져 가는 계절감을 기술을 통해 더욱 정교하게 복원하고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제철코어는 갈수록 더욱 중요한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을 것이다.